나이 먹으면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옛날 이야기 하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다행히 이 블로그에서는 그다지 옛날 이야기는 하지 않은 것 같네요. 아직은 제가 요즘 이야기 할 꺼리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그렇지만 오늘은 옛날 이야기 좀 해볼까 합니다.
80년대 초중반, 제가 아직 쌩쌩한 학생이던 시절, 저희 앰네스티 그룹에서 같은 학생들끼리 힘을 모아 자료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앰네스티에서 나온 자료를 번역하고, 거기에 우리 실정에 맞는 내용을 더 첨가해서 나름대로는 상당히 그럴듯한 책자가 되었습니다. 그 인쇄가 나온 날, 저는 인쇄물을 찾아들고 아마 한국지부 사무실로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다가... 늘 그렇듯이, 검문검색에 걸렸습니다. 제 자료를 들여다 본 전경이 제꺼덕 저를 연행해 버렸습니다. 불온문서 소지 쯤에 해당한 것이지요. 그런데 기가 막히는 것은, 그 자료가 편지쓰기 안내책자였다는 겁니다. 앰네스티 활동의 중심이 편지쓰기, 그것도 다른 나라 정부에 편지쓰기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영문편지 쓰는 것을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아서 만든 자료입니다.
제목도 찬란한 'Guide for Letter Writers'. 내용은 당시 유행하던 펜팔 안내책자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편지쓸 때 주의해야 할 사항, 각각의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표현방법, 여러가지 사례를 염두에 두고 만든 예문들... 그걸, 잡아간 겁니다. 제가 볼 때 유일한 문제는 책자 첫 마디가 '억압적인 정부는...'으로 시작한다는 것이었지요. 한국정부에 대한 묘사도 아닌데 잡혀가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전경 중대장 쯤 되는 아저씨의 구박을 받으면 몇 시간 잡혀 있다가 풀려 났습니다만, 한 개인의 시민권이 얼마나 간단히 국가권력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무참히 짓밟힐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물론 당시에 이런 일은 이야기거리 축에 들지도 못했기 때문에 어디 가서 떠들지도 못했습니다.
이 외에도 길가다 앰네스티 자료 때문에 문제가 된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나 붙잡고 가방 열라던 시절이니까요. 다행히 앰네스티 자료가 다 영어인지라, 검문하는 경찰이 번역해 달라고 하면, 저도 영어 잘 못한다고 둘러대고 빠져나온 일은 부지기수였습니다. 요즘 전경들은 안 그렇겠지요?
2009년의 새날을 여는 순간 종로2가 일대에서 벌어진 일의 의미를 곱씹어보다가 갑자기 옛날 일이 떠올라 버렸습니다. 풍선과 유인물, 손피켓을 시위용품이라고 사람들을 제지한 일은, 좋게 생각하면 코미디요 웃음거리이지만, 사실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권력의 자의적 판단이 어디까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들어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고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고편에 뒤이은 본편을 생각하면 식은 땀이 흐릅니다. 이제는 정말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떠오르니까요.
경찰은 풍선을 가로막은 행위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의거한다고 주장한다는 데, 문제는 이 집시법이 전두환 시절의 문제를 되풀이하지 않고, 시민들에게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개정된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다면, 법이 잘못되었거나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겠지요.
옛 생각을 하다보니 덩달아 떠오르는 사건 두 가지.
역시 80년대 초, 앰네스티 한국지부 정기총회에 안기부(당시 이름이 맞나요?) 요원 한 사람이 방청을 했습니다. 총회장 제일 뒤 벽에 붙여놓은 예비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또 나름대로 그 요원을 감시(???) 한답시고 그 옆에 붙어앉아 있었더랬지요. 간간이 회의진행 상황을 보면서 제게 논평 비슷한 것을 하는데 그 수준이 너무나 높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회원들 보다 오히려 앰네스티에 대한 이해가 높더라고요. 회원 하면 잘 하겠더구만요.
세월이 흘러 90년대 초, 대전에서 총회를 하는데 지역 경찰이 찾아왔습니다. 우락부락한 그 아저씨는 늘 하던대로 거들먹 거리며 들어오다가 쫓겨 났습니다. 반면 안기부에서는 어여쁜 젊은 여성을 파견했습니다. 어찌나 예의바르고 사근사근 하던지... 회의 참관은 못했지만, 회의의 주요 참석자들과 회의 전에 함께 앉아 식사(차?)를 나누고 돌아간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앰네스티는 늘 감시의 대상이었던 것이지요.
얼마 전, 사무국장님이 앰네스티 전화가 혹시라도 도청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워 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검열과 감청의 추세를 보거나 현재 추진하고 있는 입법 등을 보더라도 아주 터무니없는 의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제 전화나 메일도 보고 계신 분이 있으신가요? 무지 재미없고 한심하실 터인데... 설마 없겠죠? 에구 모르겠네요.
굳이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경험하게 되는 데자뷔 현상들을 보면서 솔직히 제 머리가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제가 젊어진 것 같기도 하고, 다 늙어서 맥이 빠진 노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해 보려고 노력은 하는데 수용이 안되네요. 우울하고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도 있는데, 여러분의 정신건강은 안녕하신지요?
'있는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거의 틀림없이 그렇다고 믿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저는 누가 전화를 세번이나 했는데 부재중 통화가 하나도 없더라고 불평했더니 듣던 분이 바로 '도청!'하고 외치던데요?
근거가 있는 이야긴지 없는 이야긴지..
구르다보면이라는 필명 재미있네요.
자주 들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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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0년대 운동한 사람들 다 이런생각 할겁니다.
2009/01/12 22:03요즘들어 유난히 전화기가 지직거려 통화중에
상대편에게 우리전화 도청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있는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거의 틀림없이 그렇다고 믿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2009/01/13 09:07저는 누가 전화를 세번이나 했는데 부재중 통화가 하나도 없더라고 불평했더니 듣던 분이 바로 '도청!'하고 외치던데요?
근거가 있는 이야긴지 없는 이야긴지..
구르다보면이라는 필명 재미있네요.
자주 들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