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회원 분께서 방명록에 긴 글을 남겨주셨습니다. 비밀 글로 남겨주신 점을 존중해서 자세히 공개하지는 않습니다만, 요약하면 왜 한국지부가 한국문제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느냐는 질책이라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원래의 글은 훨씬 더 풍부하고 깊이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다른 부분은 한국지부가 경청하면 될 내용이고, 이 글에서는 이 한 부분에만 특정해서 답을 해볼까 합니다. 글의 성격상 다른 분들도 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 답글로 달지 않고 새로운 포스트로 올립니다.
안녕하세요. 정성껏 쓰신 말씀 잘 읽었습니다. 꼭 기억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답장을 드리기 전에 몇 가지 전제할 것이 있습니다.
일단 말씀하신 내용의 대부분은 지부장이 아닌 사무국장님께서 답변하실 수 있는 사항입니다. 따라서 제 답은 지부장이라기 보다는
오랫동안 활동한 회원의 자격으로, 원칙적인 측면에 한정될 수 밖에 없음을 말씀 드립니다. 또한 이런 공개적인 공간을 통해서는
말씀드릴 수 없는 부분도 있음을 이해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우선 앰네스티의 가장 기본적 원칙 중의 하나인 국제적 연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앰네스티 운동은 그 출발부터 한 나라의
사람들이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돕는다는, '국제적 품앗이'의 정신으로 출발했습니다. 인권문제가 없는 나라는 없기 때문에, 만일
모든 나라의 지부들이 자기나라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활동한다면 국제앰네스티라는 조직의 존재이유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직 각 국가별 앰네스티만 있으면 될 것이고, 이렇게 될 경우 현재 앰네스티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의 대부분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런 원칙에는, 인권이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것이며 피해자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떤 인종인지 등을 모두 떠나 똑같이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로 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권의 보호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전세계의 시민들이 함께 연대하여
노력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앰네스티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으로써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저는 이런 원칙이 한국사회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으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회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귀한 원칙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앰네스티는 각국 지부의 활동에 있어서 자국문제에 대한 활동과 국제적인 활동 사이에 균형을 지키도록 엄격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국문제에 개입하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여러 가지 제한을 두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2008년 한 해 동안 한국지부의 활동역량은 한국문제에 충분히 투입되지 않았나 합니다. 우리가 한국지부라는 이유로 한국문제를
우선시 한다면 이는 이미 국제앰네스티의 정신을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물론 이런 원칙들이 한국지부가 맡아야 할 한국에 관한
독특한 역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다음으로 앰네스티의 활동방법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앰네스티가 어떤 발언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그 전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상황에 대한 조사입니다. 그리고 앰네스티의 조사활동에 관한 모든 책임과 권한은 원칙적으로 국제사무국이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예외는 그야말로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그리고 조사 없이는
발언도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따라서 한국상황에 대해 발언하는 일차적 권한은 국제사무국에 있으며, 한국지부가 하고자 할 경우에는 반드시 사전에 국제사무국과
협의를 통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 여름 촛불집회의 조사를 위해 조사관이 긴급하게 파견되는 바람에 국제사무국 역시 예정된
조사일정에 차질이 빚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 기간에 해야 할 다른 조사들이 뒤로 밀렸을 것이고 이런 문제들 역시
모두 긴급하고 중요한 인권침해들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조사관이 한국에 와 있는 동안 가까운 몽골에서도 인권이 광범위하게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관련
조사역량이 한국에 투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앰네스티로써는 훨씬 적은 역량만을 투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야
촛불집회가 더 중요하다고 느껴지겠지만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몽골에서의 상황이 더 심각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국에서 좀 더 일찍 상황이 벌어져서 그런 결과가 빚어진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국제사무국에 한국에서 또 다시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니 조사역량을 우선적으로 투입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부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세계 각국 지부들이 국제사무국에 서로 자기 나라에 관한 문제를 우선 조사해 달라고 압력을
넣고 로비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앰네스티라는 조직은 그야말로 조각조각 분해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설사 한국지부만 그런
행동을 하고, 그것이 성공적이라고 해도 몇 년이 지나면 오히려 한국에 대한 국제사무국의 관심은 현재보다 더 떨어지게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다양한 인권이슈 간의 균형문제도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정된 앰네스티의 조사역량이나 한국지부의 활동역량
속에서 대한민국이 차지할 수 있는 부분 내에서도 다양한 인권이슈에 대한 배분의 문제는 역시 어려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개인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인권침해에 국제앰네스티나 한국지부가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못하는 것에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단순 비교만 해도 촛불집회 참여자들에 대한 인권침해에 비해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인권침해는 훨씬 더
심각하고 대규모이며 역사가 깊지만, 역량이 충분히 투입되지 못하고 있는 분야입니다.
이 외에도 앰네스티의 개입을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인권침해는 대한민국 내에도 수 없이 많습니다. 이들 이슈들 사이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한지를 가리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여건에 따라, 우리의 역량에 따라,
긴급성에 따라 그때그때 판단하고 활동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나 다양한 이슈 사이에 균형을 맞추고 하나의 이슈
때문에 다른 이슈가 완전히 희생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겠지요.
1980년 군사정권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형을 선고했을 때, 이들을 살리기 위해 철야시위를 벌인 많은 나라 사람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이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도 인권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먼 한국의 인권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했기 때문에 아마 몇몇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돕는 것이 앰네스티의 정신입니다.
지난 여름 촛불집회와 관련해서 많은 나라의 사무국장들이 한국정부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중 일본지부의 사무국장을 특별히
기억하고 싶습니다. 당시 일본의 인권상황 역시 여러 긴급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앰네스티 일본지부의 경우 종군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앰네스티의 활동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인권상황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앰네스티는 커다란 조직이지만 그 역량에는 한계가 있고, 세계의 인권문제는 모두 대처할 수 없이 많습니다. 한국지부는 앰네스티
내의 아주 작은 조직이며 그 역량은 역시 매우 작습니다. 촛불집회에 관여한 일만 해도, 불과 이삼 년 전의 한국지부 역량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지부는 가진 역량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역량이
지금보다 더 커진다면 말씀하신 문제의 상당부분이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 여름 한국지부는 원래 중국의 인권상황에 대한 캠페인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촛불집회 때문에 중국 캠페인에는
많은 역량을 투입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에 대해 작은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이런 국제적인 빚을 갚아야 할
때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의 상황에 대한 모니터를 게을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국내의 인권단체들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진 인권운동사랑방이나 천주교인권위원회를 비롯해서
많은 인권단체가 있습니다. 이 분들은 촛불집회 기간 자신들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인권침해감시단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분들의 노력과
협조가 없었다면 앰네스티의 조사도 훨씬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국의 인권상황 개선을 위해 더 많은 시민들이 이들 인권단체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성장을 위해 애써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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