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더도 덜도 없는 연애소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연애가 좀 요상합니다. 이 둘은 1988년부터 2004년까지, 20대 초에서 30대 중반까지, 무려 16년 동안 서로에게 가장 친하고 가장 함께하고 싶은 사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이 대부분의 기간 동안 친구로 서로의 주변을 맴돌기만 하면서 진행됩니다. 그 팽팽한 긴장감을 상상하실 수 있겠어요? 주로 SF나 판타지, 추리소설만 읽는 저이지만, 긴장감으로만 놓고 보면 전혀 뒤지지 않는 설정이고 전개입니다.
소설의 구성방식도 매우 재미있습니다. 매년 딱 하루의 이야기만 진행됩니다. 세인트 스윈던스 데이라고, 윈체스터의 성자 스윈던을 기리는 날인데, 이 날 비가 오면 40일간 계속 비가 내리고, 맑으면 40일 내내 맑은 날씨가 계속된다는 전설이 있는 날입니다. 일 년 중 단 하루, 이 날 일어난 사건과 사건 틈틈이 살짝 보여지는 회상 만으로 이십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는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제가 손을 떼지 못하고 읽으면서 흥미롭게 본 지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밝음과 어두움, 가벼움과 무거움
남자는 밝고 즐겁게 세상을 살아가는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긍정적으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인생에 주어지는 기회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반면 여자는 그 반대의 인물입니다. 세상의 어두운 면에 주목하고 이를 개선하고 싶어합니다. 물론 스스로에 대한 관점도 비판적입니다. 아름답지만 스스로를 꾸미지는 않습니다.
이런 구도는 끝까지 지속됩니다. 서로 조금씩 변화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바뀌지 않습니다. 작가는 이 둘 사이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습니다. 사실 어느 쪽을 택하든 두 젊음은 외롭고 막막할 뿐입니다. 그러나 두 세계관의 간극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어떻게 비어져 나오는지, 그리고 두 인생의 양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세심하게 묘사됩니다.
2. 친구와 연인 사이, 영원한 딜레마
젊은 시기 한번쯤 생각해보고 꽤나 진지하게 토론도 해보았을 주제입니다. 이성 간에 친구는 가능한가. 주인공 두 사람은 서로를 친구, 그것도 가장 좋은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고, 가장 힘들고 내밀한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그 친구 사이는 늘 아슬아슬 하기만 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당연히 각자의 이성관계 역시 숨김없이 공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두 사람이 머리로 어떤 생각을 하든, 삐걱거림이 발생합니다. 너무 좋은 친구라서 연인으로 발전시키기 꺼려지는, 그렇지만 그 상황 역시 만족스럽지는 않은, 게다가 다른 이성에게 빼앗기고 싶지도 않은 그런 관계는 어떻게 지속될까요?
3. 엇갈리는 감정곡선, 타이밍의 문제
길고 긴 세월 동안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지만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감정곡선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문제는 그게 서로 타이밍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디 이성관계만 그렇겠습니까? 모든 관계에서,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에서 타이밍이란 맞기 보다는 맞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듯 합니다. 우리 인생의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잘못된 타이밍으로 인해 스쳐 지나가게 될까요.
무려 16년이라는 긴 세월이 대단히 세밀하게 진행되는 까닭에, 독자는 두 주인공의 인생의 기복과 달라지는 모습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 관찰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조금씩 쌓여간 세월의 축적이 자신들의 인생을 어긋나게 만드는 타이밍을 끊을 수 있게 해줄 때,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4. 영국의 변화, 영국 젊음의 속사정
영국이라는 나라는, 제가 느끼기에는 상당히 신기한 나라입니다. 소위 선진국에 살아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겪을 것 다 겪고 뭔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을 듯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버텨가는 여유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대처시대의 마지막 시기에서 시작하여 2007년에야 끝을 맺는 이야기는 이 혼돈의 시기 영국의 사회와 그 속을 살아가는 젊음을 잘 보여줍니다.
대처시기에 이루어진 무지막지한 신자유주의적 - 당시에도 그렇게 불렀나요? - 개혁의 광풍의 터널 끝에서 대학을 졸업하는 두 사람에게 인생은 무엇을 향해서든 열려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막혀있기도 합니다. 과거의 영광이 빛을 바래고, 개인이 직면하기에는 쉽지 않은 사회의 상황. 그 속에서 어떻게든 희망을 안고, 혹은 잃고 버텨나가는 젊음의 모습에서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의 위치를 미루어 짐작해보는 것도 소설이 주는 재미입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영국은 우리의 길을 조금 먼저 걸어간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책은 참 쉽고 흥미진진하게 읽힙니다. 톡톡 튀는 현대어가 구사된 번역 역시 읽는 맛을 더해 줍니다.
그런데 왜 이 책을 앰네스티 일기에 올리느냐고요? 책에 앰네스티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두 번. 비록 국제사면위원회라는 옛 이름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요. 여주인공이 참 어려운 시기에 앰네스티 활동을 시작할까 고민하는 대목이 있고, 그 몇 년 후에는 앰네스티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국제사무국일까요, 영국지부일까요?
유럽이나 미국의 영화, 문학 작품에 보면 앰네스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주로 인권단체로써의 이미지가 강했다면, 요즘에는 인생과 사회에 대해 고민하는 똑똑한 여주인공이 앰네스티의 일원으로 종종 그려지는 것 같네요. 아마 그런 종류의 현대적 여주인공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배경이 앰네스티이기 때문일까요?
소설의 구성방식도 매우 재미있습니다. 매년 딱 하루의 이야기만 진행됩니다. 세인트 스윈던스 데이라고, 윈체스터의 성자 스윈던을 기리는 날인데, 이 날 비가 오면 40일간 계속 비가 내리고, 맑으면 40일 내내 맑은 날씨가 계속된다는 전설이 있는 날입니다. 일 년 중 단 하루, 이 날 일어난 사건과 사건 틈틈이 살짝 보여지는 회상 만으로 이십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는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제가 손을 떼지 못하고 읽으면서 흥미롭게 본 지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밝음과 어두움, 가벼움과 무거움
남자는 밝고 즐겁게 세상을 살아가는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긍정적으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인생에 주어지는 기회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반면 여자는 그 반대의 인물입니다. 세상의 어두운 면에 주목하고 이를 개선하고 싶어합니다. 물론 스스로에 대한 관점도 비판적입니다. 아름답지만 스스로를 꾸미지는 않습니다.
이런 구도는 끝까지 지속됩니다. 서로 조금씩 변화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바뀌지 않습니다. 작가는 이 둘 사이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습니다. 사실 어느 쪽을 택하든 두 젊음은 외롭고 막막할 뿐입니다. 그러나 두 세계관의 간극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어떻게 비어져 나오는지, 그리고 두 인생의 양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세심하게 묘사됩니다.
2. 친구와 연인 사이, 영원한 딜레마
젊은 시기 한번쯤 생각해보고 꽤나 진지하게 토론도 해보았을 주제입니다. 이성 간에 친구는 가능한가. 주인공 두 사람은 서로를 친구, 그것도 가장 좋은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고, 가장 힘들고 내밀한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그 친구 사이는 늘 아슬아슬 하기만 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당연히 각자의 이성관계 역시 숨김없이 공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두 사람이 머리로 어떤 생각을 하든, 삐걱거림이 발생합니다. 너무 좋은 친구라서 연인으로 발전시키기 꺼려지는, 그렇지만 그 상황 역시 만족스럽지는 않은, 게다가 다른 이성에게 빼앗기고 싶지도 않은 그런 관계는 어떻게 지속될까요?
3. 엇갈리는 감정곡선, 타이밍의 문제
길고 긴 세월 동안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지만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감정곡선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문제는 그게 서로 타이밍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디 이성관계만 그렇겠습니까? 모든 관계에서,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에서 타이밍이란 맞기 보다는 맞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듯 합니다. 우리 인생의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잘못된 타이밍으로 인해 스쳐 지나가게 될까요.
무려 16년이라는 긴 세월이 대단히 세밀하게 진행되는 까닭에, 독자는 두 주인공의 인생의 기복과 달라지는 모습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 관찰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조금씩 쌓여간 세월의 축적이 자신들의 인생을 어긋나게 만드는 타이밍을 끊을 수 있게 해줄 때,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4. 영국의 변화, 영국 젊음의 속사정
영국이라는 나라는, 제가 느끼기에는 상당히 신기한 나라입니다. 소위 선진국에 살아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겪을 것 다 겪고 뭔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을 듯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버텨가는 여유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대처시대의 마지막 시기에서 시작하여 2007년에야 끝을 맺는 이야기는 이 혼돈의 시기 영국의 사회와 그 속을 살아가는 젊음을 잘 보여줍니다.
대처시기에 이루어진 무지막지한 신자유주의적 - 당시에도 그렇게 불렀나요? - 개혁의 광풍의 터널 끝에서 대학을 졸업하는 두 사람에게 인생은 무엇을 향해서든 열려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막혀있기도 합니다. 과거의 영광이 빛을 바래고, 개인이 직면하기에는 쉽지 않은 사회의 상황. 그 속에서 어떻게든 희망을 안고, 혹은 잃고 버텨나가는 젊음의 모습에서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의 위치를 미루어 짐작해보는 것도 소설이 주는 재미입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영국은 우리의 길을 조금 먼저 걸어간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책은 참 쉽고 흥미진진하게 읽힙니다. 톡톡 튀는 현대어가 구사된 번역 역시 읽는 맛을 더해 줍니다.
그런데 왜 이 책을 앰네스티 일기에 올리느냐고요? 책에 앰네스티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두 번. 비록 국제사면위원회라는 옛 이름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요. 여주인공이 참 어려운 시기에 앰네스티 활동을 시작할까 고민하는 대목이 있고, 그 몇 년 후에는 앰네스티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국제사무국일까요, 영국지부일까요?
유럽이나 미국의 영화, 문학 작품에 보면 앰네스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주로 인권단체로써의 이미지가 강했다면, 요즘에는 인생과 사회에 대해 고민하는 똑똑한 여주인공이 앰네스티의 일원으로 종종 그려지는 것 같네요. 아마 그런 종류의 현대적 여주인공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배경이 앰네스티이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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