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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귄의 작품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어스시 이야기' 시리즈일 것이다. 장편과 단편들로 이루어진 어스시 시리즈는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지 소설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그거야 사람 취향마다 다를 것이고,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그 르귄이 최근 들어 발표한 작품이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이다. 소년소녀가 주인공이고 그들의 성장을 다룬다는 점에서 청소년용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성인이 읽어도 역시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 3부작은 '기프트', '보이스', '파워'의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세 권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기프트(GIFTS)

서부해안의 북쪽 고원지대에 사는 오렉은 작은 영지를 물려받을 영주로 태어났다. 이 지역의 영주들은 혈연관계로 전해 내려오는 독특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사용해서 자신의 영지와 사람들을 지킨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의 파괴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힘에 의심을 품은 오렉은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모두 포기하고, 또 다른 능력인 시의 세계를 찾아 여자친구인 그라이와 함께 떠나간다.



보이스(VOICES)

서부해안 남쪽의 도시 안술에서 태어난 메메르. 그러나 안술은 동쪽 사막에서 온 침략자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다. 자신들의 종교 외에는 악마로 치부하고, 모든 책을 죄악으로 여겨 불태우는 침략자들. 메메르가 사는 집에는 비밀도서관이 있고, 메메르는 책의 목소리를 듣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오렉과 그라이의 도움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시민들. 메메르는 오렉과 그라이를 따라 떠난다.



파워(POWERS)

어릴 적 누이와 함께 노예로 잡혀 온 가비르. 그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사는 서부해안 중부지역의 도시국가는 엄격한 신분제와 더욱 엄격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회다. 전쟁을 겪고, 누이의 죽음을 겪은 후, 산 속의 탈주자 들의 사회를 거쳐 자신이 태어난 습지로 돌아가지만, 그곳 역시 자신이 머물 곳이 아님을 깨닫고 오렉을 만나기 위해 자유로운 대학도시로 떠난다.



이미 큰 성공을 거둔 작품들을 발표한 검증된 작가의 원숙한 작품, 게다가 판타지 소설이므로 재미에 대해서는 따로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즐겁고,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책들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책들은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수도 없이 던져준다.
 
세 권으로 이루어진 서부해안 연대기는 각 권 모두가 완전히 다른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또 완전히 다른 사회들이 함께 등장한다. 이 모든 사회들은 서로 다르지만 각각의 모순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책들에서 사람과 사람이, 이해관계와 이해관계가, 문화와 문화가, 권력과 시민이 부딪혀 갈등하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인권에 대한 존중의 문제가 깔려 있다.

기프트의 경우, 외적인 갈등은 주로 주변 영지와의 충돌에서 비롯되지만, 실제로는 주인공에게 태어날 때부터 부여된 영주로서의 책임, 그리고 그 책임을 제대로 하기 위해 기대되는 능력과 주인공 자신의 희망 사이의 충돌이 주된 갈등을 구성한다. 외부의 압박과 기대 속에 자라나는 소년은 결국 스스로의 꿈을 선택한다.

보이스에서의 갈등은 보다 직접적이다. 보다 진보된 도시문명과 삭막한 사막세력 사이의 물리적 갈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관용과 불관용이 진영을 넘어 충돌하고, 결국 책으로 대표되는 지식과 문화는 무기와 종교적 억압에 승리를 거둔다. 그 안에서 소녀는 책과 대화하면서 결국은 시인을 따라 자신의 삶터를 떠나간다.

파워에서 주인공은 신분의 억압 속에 놓여있다. 신분제에 기초하여 가문과 종교로 유지되는 도시국가는 결국 전쟁을 통해 모순을 드러내고,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거는 소년은 도시국가의 규율에서 벗어난 산 속 사람들과 합류해 보지만, 그곳에도 여전히 불평등과 압제는 존재한다. 최종적으로 기억조차 없는 고향마을을 찾지만 가장 평화롭고 조화로운 그곳 조차도 힘과 권력을 향한 투쟁과 불평등의 존재를 깨닫는다.

참으로 다양한 사회체제 속에서 한 인간이 겪는 갈등과 압제를 현실감 있게 묘사한 이 책은 개인의 자유와 존엄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내가 특별히 이 시리즈에서 주목하는 것은,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모든 사회체제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다.

거장으로 불리는 판타지 작가로서는 드물게 여성인 작가는, 그의 모든 작품 속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작인 어스시 이야기에서도 같은 마법을 쓰지만, 남성의 마법이 권력을 부여하고 존경 받는 데 비해, 여성의 마법은 천대받고 무시당한다.

이런 분위기는 서부해안 연대기에서도 여전히 이루어진다. 아무리 다른 사회체제라도 여성에 대한 억압만은 어디에서나 동일한 데, 바로 이런 차별이 결과적으로는 그 사회 전체의 모순을 강화하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더 행복해질 수 없게 만드는 요인임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책에서 무엇을 얻는가 하는 것은 독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한 판타지로 이 책들을 소비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하면 읽어가면 인간은 어떻게 자유로워지고 존엄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여정에서 어떤 희생과 결단이 따르는지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여성의 억압적 상황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애정 어린 시선은, 작가가 여성임을 떠올릴 때, 왜 우리사회에서 여성의 참여 폭이 늘어나야만 하는지, 여성이 사회의 주류가 됨으로써 남성이 하지 못하는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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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링컨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읽고 갑니다.....^^

    2010/04/02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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